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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9호 2026년 05월 18 일
  • [그땐 그랬지!-여행전설 김종원] 1969년 전 직원 720명… 첫 월급 1만2000원



  • 류동근 기자 |
    입력 : 2016-06-07 | 업데이트됨 : 6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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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각박해져 가고 있는 것이 요즘 업계의 현실이다.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감각조차 상실한 채, 치열한 경쟁 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모습에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본지는 수십 년 간 여행·항공업계의 최선봉에 서서 젊음을 불사른 원로들의 경험담을 시리즈물로 기획해 봤다. 우리나라 여행·항공업계의 산 역사를 써 온 많은 원로들의 소중한 경험들이 현재를 이끄는 우리들에게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발판이 되길 기대해 본다.

 

치암(痴岩) 김종원은…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후 1967년 3월 당시 국영인 대한항공공사에 국영 공채1기생으로 입사했다. 88년 초 한진관광으로 자리를 옮겨 11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여행업계 1.5세대인 그의 호는 치암(痴岩)이며, 현재 세종대학교 호텔관광대학/대학원 초빙교수이다. 좌우명은 진인사 대천명.

 

그땐 그랬지! l 여행전설 김종원 편

1. 국영 대한항공공사

② 대한항공의 초창기

③ 여행업계 1.5세대

④ 항공·여행업 50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제1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의 모체는 국영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다. 47년 전인 1969년 3월 대한항공공사가 민영화로 전환되면서 오늘의 대한항공이 탄생했다.

 

대한항공이 설립되기까지 정치적·사회적으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부수립직후인 1948년 10월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가 도산위기에 처하자 정부는 1962년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만성적자가 개선되지 않자,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한진상사 조중훈 사장에게 15억8000만원에 10년거치 후 이자를 내도록 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를 한진상사에 넘기게 된다. 그때가 1969년 3월1일.

 

민영화되기 2년 전인 67년 3월1일. 김종원(金鍾元)교수(이하 김교수)는 국영 대한항공공사 공채1기생으로 입사한다. 입사 당시 대한항공공사의 전체 직원은 720명이 고작이었다. 사원으로 입사하니 4급8호봉에 월급은 1만2000원(당시 육군소위 월급 4000원)이었다. 70년대 초 자장면 가격이 150원 정도였으니, 자장면 100그릇 값도 안 되는 봉급이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개풍빌딩(현재 시청근처 한화빌딩) 1∼5층을 사용했으며, 사장은 심유협씨로 공군 소장출신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혁명주체자 중 한명.

 

김교수의 대한항공공사 입사 시 에피소드도 남다르다. 육군소위로 재직할 당시 우연히 조선일보에 ‘대한항공공사 해외파견 특별요원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현역은 지원자격이 안된다고 하더라. 어쩔 수 없이 사귀던 동생(지금의 와이프)을 시켜 지원서를 받아 시험을 보게 됐다. 시험은 영어와 논문 상식 3가지를 봤는데, 66년 말 38대1의 국영 공기업 경쟁률은 대단했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18명이 합격해 공채1기 입사동기가 됐다.

 

현역이다 보니 첫 발령지는 대한항공공사 대구지점이었다. 67년 2월 제대 후 3월 정식입사를 한 후 판매부 선전과로 배치가 됐다. 판매부에는 선전과와 국제판매과가 있었데, 지금은 마케팅부서지만 그 당시는 판매부에서 모든 업무를 총괄했다. 국제판매과에서 일하기를 희망했으나 선전과로 배치돼 다음날 선전과장(유철종)에게 “왜 선전과로 발령났냐”고 물었더니, 서울대신문 편집장 경력을 감안했다고 하더라. 선전과에서 하는 일은 모든 제작 업무와 기자접대 및 홍보, 광고업무였다. 당시 직원 12명이 선전과에 있었는데 디자이너만 5명이었다. 디자인 실장은 서울대 미대 10년 선배였다.

 

선전과 일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김포공항 내 기자실에 20여 명의 기자들이 상주해 있었는데, 이분들이 왜 맨날 공항에 나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공항에는 사실상 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기사거리가 거의 없는데, 그 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할 일이 없어 고스톱만 치더라. 국가적으로도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당시 유철종 선전과장한테 개선해줄 것을 건의를 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대한항공에 다니면서 딱 3번의 사표를 냈는데, 이 일로 처음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니 아내는 난리가 났다. 선전과장이 불러 왜 사표를 내냐고 묻길래 “명색이 명문대 영문과를 나왔는데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게 뭐냐. 기사만 쓰라면 쓰겠는데, 신문광고에 기자접대에 포스터업무에 모든 잡다한 업무를 하니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유과장의 설득으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일하다 입사 3년 후 본인이 원하던 국제판매과로 자리를 옮겨 항공맨으로서 본격적인 나래를 펼치게 됐다.

<류동근 국장> dongkeun@g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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