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대한항공공사
2. 대한항공의 초창기
③ 여행업계 1.5세대
④ 항공·여행업 50년
국영이던 대한항공공사가 민영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68년 10월20일 대한항공공사는 최초로 도입한 DC-9 기종을 처음으로 김포?오사카에 띄우게 된다. 첫 비행에 고무된 탓인지 오사카공항에 착륙하다 그만 엔진에 불이 나는 사고를 냈다.
산케이신문 등 일본 유력 신문들은 이 사고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항공공사 장성환 사장(공군 참모총장 출신)에게 사고경위를 파악하는 한편으로, 조중훈 당시 한진상사 사장을 불러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할 것을 제안하게 된다.
조중훈사장은 항공회사보다 해운회사 인수를 희망했으나, 박대통령의 설득으로 결국 대한항공공사를 먼저 인수하게 돼 이듬해인 69년 3월 대한항공은 본격적인 민영화의 길을 걷게 된다.
67년 대한항공공사 공채1기로 입사한 김종원 교수는 민영화된 후 국제판매과 국제판촉계장으로 보직을 옮긴다.
원하던 보직으로 이동해 왕성한 활동을 하던 1972년 4월,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영업담당 이덕영상무는 에어프랑스에서 대한항공과 조인트벤처 제안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도쿄지점장시절 알고 지내던 에어프랑스 미스터 스토켄으로부터의 제안이었다.
당시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로, 이상무는 즉각 조중훈사장에게 보고 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상 유럽을 뜰 수 있는 여건이 안 돼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상무는 김교수(당시 국제판촉계장)를 불러 테스크포스팀장을 맡아 5명을 선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6개월간 준비해서 에어프랑스와 협상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29세에 최연소 팀장이 된 김교수는 회의자료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를 6회 방문하고 6개월간 회의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당시 대한항공 빌딩 21층부터 26층까지는 호텔이었다. 테스크포스팀원과 6개월간 호텔에서 숙식을 하면서 회의 자료를 준비했다.
당시 대한항공 중역은 조중훈사장과 조중건 부사장 등을 포함해 16명에 불과했다.
중역이 있는 자리에서 에어프랑스에 제안할 자료를 브리핑했다. 당시 명의택 전무는 조중훈사장이 있는 자리에서 “김종원이가 대한항공을 말아 먹으려고 한다. 당장 그만둬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중건부사장도 반대를 했다. 이유는 “현재 보잉707기종 밖에 없는데다 앵커리지를 경유해 23시간을 비행해서 파리까지 날아간다는 것은 유류값 등을 고려해 봤을때 타산이 맞지않는다”며 당시 대한항공의 마케팅능력이나 운행경험 등이 열세인 상황에서 에어프랑스와의 제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자 김교수는 당황한 나머지 조중훈사장을 쳐다봤더니, 눈짓으로 용기를 줬다고 한다.
첫 브리핑이후 이상무는 보름간 여유를 줬고 다시 회의 자료를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6번만에 브리핑이 통과하자 조중훈사장은 수고했다고 삼선짜장을 김교수를 포함한 팀원들에게 시켜줬다. 그러나 두시간반에 걸친 긴장된 브리핑이 끝나자 마자 짜장면을 먹으니 속이 편할 리 없었다.
16번째 브리핑에서 통과하자 이 내용을 가지고 에어프랑스와 내고를 하게 된다. 이듬해 에어프랑스 회장이 직접 대한항공빌딩에 와서 서명을 했으며, 당시 김교수는 통역을 담당하는 영예도 얻었다.
어째됐건 6개월간의 회의자료 준비로 김교수는 난시가 찾아왔고 30세부터 난시안경을 써야 했지만 에어프랑스와의 제휴성공은 길이길이 가슴 한켠에 뿌듯함으로 남아있다.
31세 되던 해 김교수는 런던지점장(차장)으로 가게 된다. 지점장 시절 에피소드가 있는데, 조중훈 회장은 가족동반 여행을 즐겨해 1년에 두 번 정도 런던을 방문한다.
언젠가 5가족이 런던을 오는데, 조회장은 “자식들은 같은 비행기에 타는 게 아니다”며 따로따로 비행기를 태워서 런던으로 오게 한 것.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 대가 끊긴다는 게 조회장의 지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런던지점장인 김교수는 조중훈사장의 가족여행이 런던으로 정해지면 수십번 공항으로 가서 가족들을 픽업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감수해야 했다.
런던 지점장 시절 김교수는 맹활약을 했다. 라바노스그룹의 43만톤급 컨테이너(한개 무게 15톤)를 글라스코에서 우리나라로 차터로 수송하는데 성공하는 한편, 라바노스그룹 관계자 150명을 최초로 차터기로 김포로 모시고 와서 울산으로 내려가 계약을 성사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