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산길 도전해발 1800m의 발디제르의 새벽은 초겨울 라이딩 복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8월 한여름의 알프스이지만 100m마다 1도씩 낮아지는 알프스의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여름용 바이크 자켓 속에 바람막이용 자켓을 한두 개씩 더 끼어 입고 <죽음의 산길>을 넘는 날 아침은 무엇을 먹었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
발디제르를 떠나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아침 8시. 이곳부터 프랑스 알프스 지역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자연이 잘 보전된 국립 바노아즈 공원(Parc national de la Vanoise)이 시작됐기에 가슴은 더 설렜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산소 부족으로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고산 초원지대로 접어들었다.
해발 2600m 지점을 통과 하다 보니 이제 풀들마저 자라지 못하는 광물지역에 들어섰다는 것을 주위풍경은 말없이 전해줬다. 약 17㎞ 급커브길을 오르고 나니 그늘진 곳곳에 아직도 쌓여있는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눈이 많아 여름스키도 즐길 수 있는, 빙하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정상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상쾌한 아침이었다. 여인같이 아름다운 산은 모든 옷을 벗어 던지고 우리를 안아줬다.
잠시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있는 데 어디선가 경주용을 연상케 하는 오토바이 한 대가 나타났다. 프랑스 말로 바이크를 타는 사람을 모타르(Motard)라 부르는데, ‘모타르’ 그 자체인 남성이었다. 우리가 지난 밤을 지새운 발디제르 스키장 에스파스 킬리에서 이 프랑스 친구는 겨울 스키시즌 동안 슬로프 관리를 하고, 비시즌 동안에는 아들과 함께 모터사이클 정비를 하며 산단다. 그는 자기도 이 정상에 오르면 너무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먼 한국에서 온 우리들은 어떤 심정일지 무척 궁금해 했다.
이제부터는 약 14㎞ 프랑스에서 가장 해발이 높은 마을 본발쉬락(Bonval sur Arc)까지의 경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꼴드리스랑 정상에서 본발(Bonval)로 내려가는 좁고 환상적인 산악도로에서 조셉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무슨 일일까. 한동안의 침묵 후에 터져 나온 조셉의 말문은 가슴을 먹먹케 했다. “내가 7년 동안 살던 곳, 내 삶 중에 가장 행복했었던 시절에 살던 곳, 내 마음의 영원한 고향이 바로 이곳이야.”
그가 과거에 알프스에서 살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곳이 그곳인지는 몰랐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 했을 때 이 마을까지 들어올 생각을 못해 전쟁도 겪지 않은 곳.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말은 가장 힘든 시간이 그 앞과 뒤를 수놓았다는 뜻이었다. “그냥 가자”는 조셉의 짧은 말 한마디가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고 우리 셋은 침묵 속을 한동안 달렸다. 여행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형태의 삶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행은 또 ‘같이 여행을 떠난 친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새롭게 재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발(Bonval)을 떠나 바노아즈 국립공원의 시작지점이라 할 수 있는 란스르부르를 향하는 길은 빙하가 녹아 만든 Arc 강을 따라 가는 멋진 길이었다. 갑자기 조셉은 침묵을 깨고 “악마의 마을로 가자”는 말을 했다.
지난 1857년 성당 주임신부와 사이가 무척 안 좋던 이 마을의 성가대원들은 악마가 신부를 두 팔 아래에 누르고 있는 목각인형을 조각가에게 주문해 만들어 신부를 골탕 먹였다고 한다. <악마>들이 온통 치장되어 있는 이 전통적 카톨릭 마을에 들어서자 마을은 축제분위기였다. 마을 곳곳에 사보아 전통의상(Savoie, 프랑스 알프스 지역 이름)을 곱게 차려 입은 소녀와 여인들이 많이 보였다.

한 프랑스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전통의상이 멋지다고 말을 하자마자 이 시골 프랑스 친구는 “내 여동생 데리고 올게”하더니, 1분도 안돼서 집에서 여동생을 끌고 나왔다. 그의 여동생은 사보아 전통의상을 곱게 걸치고 있었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보아 여인과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는 영광의 시간을 가졌다.
너무도 친절한 이 악마의 마을에 사는 알프스 산골 남자는 ‘악마’가 아니라 살아있는 ‘천사’와 다름이 없었다. ‘악마는 천사 곁에 있다’는 말 그 자체였다. 프랑스어 표현에 ‘악마 같은’이란 말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천사들이 사는 악마마을’이라는 타이틀이 가능한 이유는 아름다운 알프스 자연의 품속에서 자연의 사랑을 느끼고 자연을 죽도록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오늘도 여행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고 간다.
악마의 마을을 벗어나 란스르 부르를 거쳐 나폴레옹이 이태리 정벌을 위해 만든 굴곡이 심한 산길을 따라 꼴드 몽스니(몽스니 고개)를 다시 올라야 했다. 정상을 넘자, 엄청난 크기의 옥색빛 몽스니 호수(해발 2000m)가 눈앞에 나타났다. 조셉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에델바이스(사실은 시베리아에서 유입된 아시아 꽃)들을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환상적인 곳. 사랑하던 사람에게 에델바이스로 화관을 만들어 씌워줬다고 말하는 그의 입가엔 슬픔이 스며있었다. 이곳을 최대한 빨리 떠나야만 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셋은 과거로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었기에. 게다가 우리 셋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심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경마을 수사(Susa)에 도착하자 지름 60㎝의 피자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어른, 아이,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모두 피자 한 판 씩을 해치우는 놀라운 풍경을 뒤로 하고 다시 프랑스 브리양송을 향해 국경을 넘기 위해 출발했다.
오늘 바이크 일정은 거의 300㎞나 됐다. 시차가 아직도 회복이 안 된 상태였기에 다시 산맥을 하나 넘어야 하는 고산 산악코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국경을 넘어 프랑스 브리양송까지 가는 국도를 택했다.
브리양송을 거쳐 D902 지방도로를 따라 케라스(Queyras) 자연공원의 입구인 이조아르 고개(Col d’Izoard) 고개를 넘어가는 코스다. 자연공원을 관통해 Guillestre를 거쳐 숙소가 있는 알프스의 조용한 마을 Jausier까지 가는 고갯길과 산길들은 무척 한가했다.
5분에 차 한 대만을 만나는 멋진 길을 달리면서, 매혹적인 여인-자연-의 품속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곳이 바로 프랑스 알프스의 매력이었다. 어딜가나 자연은 천사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줬다. 그야말로 ‘자연은 자기 집에 있을 뿐, 자연과 사랑에 빠진 우리들은 자연의 집을 찾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박종필 PAA회장은]
미국 노스웨스트 항공사 입사로 항공업에 입문한 박종필 회장은 지난 1990년 퍼시픽에어에이젠시(Pacific Air Agency, PAA)를 설립, PAA 그룹사로 성장시켰다. 전 세계 20개 이상의 항공 여객 GSA를 맡고 있는 PAA의 수장이자, 항공컨설턴트, 여행칼럼니스트 등 여행업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