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모두가 배고픈 시간, 작은 피자가 배달된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피자를 고루 나눠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리학자 존 롤스가 방법을 제시한다. “피자를 자르는 사람이 맨 마지막에 남는 조각을 먹게 하라.” 조금이라도 큰 조각이 생기면 먼저 먹는 사람에게 유리할 테니 최대한 공평하게 나눌 수밖에 없다.
지난 11일, 광화문에서는 비정규직 사망사고 추모와 외주화 반대집회가 열렸다.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에 관심조차 없는 일부 자본권력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다루는 것조차 않았다. 불공평한 현실과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한국사회=곧 시험사회, 순위사회’를 초래했고 경쟁사회로 이어졌다. 現 정부 출범 이후 ‘청렴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과 2030세대의 고충이 주요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을 위한 정책들은 또 다른 불공정을 낳았다.
공정함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구성원들이 어느 가치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는 않을까. 무죄추정원칙에 따라 보석금을 낸 피의자를 풀어주는 것이 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피의자 입장에서 볼 때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상위계층의 높은 소득은 본인의 노력과 경쟁을 통해 얻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정부의 특혜지원과 과보호, 부실한 조세와 법의 불공정성에 기인한다. 탈법적인 부의 대물림도 그 이유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땅콩회항 피해자 박창진 대한항공 사무장의 길고 긴 인터뷰내용이 잊혀지지 않는다. 복직 후에도 교묘한 감시와 탄압을 받는 그와는 상반되게, 조사장은 2심 재판에서는 집행유예, 대법원 판결 후에는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직으로 복귀했다. 박 사무장은 일반승무직으로 강등됐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총수일가의 눈 밖에 났을 때 어떤 불이익이 극대화되는지 목격했기에 정당한 일에도 망설인다. 이런 일들이 대한항공에서만의 일이 아님은 다 아는 현실이다.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사회구조의 전형적이고 안타까운 모습이다.
프랑스는 ‘미혼모’라는 말이 따로 없다. 그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족’이라는 가치중립적인 명칭만 있다. 우린 언제쯤 모든 형태의 사람이 차별 없이 어울려 살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다. 정의로운 대한민국, 공정한 대한민국을 외치며 우리 함께 촛불을 밝혔던 그날 꿈꾸고 바랐던 대한민국을 위해서 세상의 불합리함에 촛불을 들었다.
하루의 시작에 커피가 필수인 나는 종종 공정무역 커피집을 찾는다. 값비싼 브랜드의 커피를 마실 때보다 풍미도, 기분도 훨씬 좋아짐을 느낀다. 커피를 즐기는 것에 앞서 무수한 농부들의 희생을 동시에 생각한다. 공정무역의 모토와 영역이 전 세계 모든 커피농장을 아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단 커피뿐 아니라 사회, 더 나아가 인류의 모든 곳, 모든 것에도 공정함이 깃들기를 바란다.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고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 법과 원칙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사회, 약자를 위한 시스템이 확실한 사회,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진 사회, 취업과 주거, 소득 등 여러 방면에서의 평등한 사회를 소망한다. 불공정과 공정의 차이는 아주 크지만,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씨앗은 너무도 명확하고 소소하다.
‘사람’. 사람이 먼저다. 나머지는 그 다음이다.더 이상 미뤄야 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