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신문 로고

HOME > Headline> Focus
제1213호 2024년 11월 18 일
  • 한국과 캐나다, 국경을 초월한 15년 우정

    기고_이윤우 모두투어 홍보마케팅부 매니저



  • 취재부 기자 |
    입력 : 2024-02-01
    • 카카오스토리 공유버튼 트위터 공유버튼 페이스북 공유버튼
    • 가 - 가 +

에디터 사진

20대, 토론토에서 만난 70대 캐나다 독거노인과 나눈 15년 우정

 

 

 

2008년 대학교 4학년 복학을 앞두고 나름 20여 개국 해외 배낭여행과 해외 인턴십도 했지만 마지막으로 영어실력도 쌓을 겸 해외 경험을 해보고 싶어 부모님이 마련해 준 등록금을 들고 무작정 캐나다, 토론토로 떠났다.

 

집의 지원을 원치 않은 탓에 칼리지 등의 교육시설 대신 운동을 하며 외국인 친구를 사귈 수 있는 YMCA에서 봉사활동을 통해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려고 맘 먹었다.

 

관광비자 6개월 기간 중 5개월 남짓 YMCA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당연히 쉽지 않았지만 정식 직원 제의를 받을 정도로 즐거운 생활을 했고,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좋은 외국인 인맥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는 그때 YMCA에서 만났던 중 가장 가깝게 지낸 ‘Ken Druce(이하 켄)’라는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난 토론토 시내 중심에 위치한 하루 700명 이상 방문하는 YMCA 서비스 데스크에서 친절하게 인사를 받아주거나 말을 걸어주는 회원들의 인상과 이름을 기억하며 봉사활동을 했다.

 

 

에디터 사진

 

 

토론토 YMCA서 만난 70대 켄

 

3개월 즈음 이름을 기억하는 50여 명의 친절한 회원들이 생기게 됐고 그 중 가장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회원이 바로 켄이었다. 그는 한국에도 관심이 많았고 매주 금요일 토론토 다운타운에 위치한 YMCA와 가까운 곳에 있는 한국 식당 BIBIM(비빔)에서 저녁을 드시는 루틴이 있었다.

 

어느 날 켄은 시간이 되면 같이 식사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좋은 인연이 생기면 선물하려고 준비한 기념품을 전달했던 그날, 해물파전과 고등어구이를 먹으며 우리는 조금 더 친해지기 계기가 됐다. YMCA에 매주 3~4회 방문하는 켄과 가끔 커피도 마시고 나에게 영어도 알려주는 고마운 관계로 발전했다.

 

관광비자 만료 두 달 정도로 남기고 가지고 갔던 돈이 거의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집에 지원을 받지 않으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아 50여 일을 남기고는 반 지하 월세도 아끼려고 집 없이 생활하기로 결정했다. YMCA의 모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기에 집 없이 생활하는 것도 단기적으로는 할 만했고 YMCA 영업이 종료되면 작은 캐리어를 끌고 나가 24시간 맥도널드에서 밤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밤 작은 캐리어를 끌고 맥도널드에서 자는 나를 발견한 켄은 나에게 이런저런 사유를 물어봤고 이런 경험 또한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라고 하였지만 그는 본인의 집에 남은 40일을 지낼 것을 권유했다. 그 이후로도 수차례 거절을 했지만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결국 그의 집에서 함께 생활을 하게 됐다.

 

가급적 저녁은 함께 먹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더 좋은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몇 가지 에피소드로는 아침에 YMCA로 가는 나에게 매일 바나나와 머핀 같은 간식을 비롯해 주 1회 200달러를 넣어 줬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거절을 했지만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평생 잊지 않고 기분 좋은 부담으로 갚겠다고 한 뒤 그의 마음과 호의를 받았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오기 전 그의 토론토 근처 스트래트포드에서 그의 74번째 생일을 함께 보냈고 난 그에게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의미 있는 생일인 80번째 생신에 다시 돌아와서 이곳에서 생일파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6년 뒤 2014년, 그의 80번째 생신에 맞춰 캐나다를 찾아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그의 80번째 생신을 함께 했다.

 

 

에디터 사진

 

‘한국-캐나다’ 서로 오가며 돈독해져

 

그날 켄은 나에게 앞으로 비행기를 타는데 무리가 없을 10년 동안은 생일 즈음에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다. 정말 그는 2015년, 81번째 생일에 한국을 방문했고 함께 일주일 동안 여행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고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시기 시작했다.

 

2016년에도 한국에서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 당시 경복궁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서류 봉투를 건네며 한국에 집값이 토론토보다 비싸다는 게 신기하다는 말과 함께 나중에 본인이 하늘나라로 가게 되면 전 재산을 나에게 주고 싶다고 받아달라는 말을 전했다.

 

고민 끝에 켄에게 다시 서류 봉투를 돌려주며 거절을 했고 앞으로 한국에 올 때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오고 그렇게 10년 뒤에도 지금과 같은 마음이 있다면 그때는 아주 조금은 당신을 기억하기 위한 용도로 조금의 유산을 받겠다고 했다.

 

그러던 그는 2017년부터 하루에 전화를 20번 이상 하는 날이 있거나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후, 비행기 티켓팅을 했다고까지 연락이 왔으나 갑자기 연락이 안 되기 시작했다. 전화, 이메일, 심지어 우편으로도 연락을 해봤으나 두 달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고 근처 병원에 전화를 해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그에게 더 많은 표현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의무감에 새벽에 전화영어를 했었는데 7개 월 정도 전화영어를 한 선생님이 캐네디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또 그 선생님 댁이 토론토 근처 브램튼이라는 것도. 그 선생님에게 연락이 안 되는 켄의 이야기를 했고 그 선생님은 마치 본인의 일처럼 그를 찾으려고 수많은 노력을 해주셨다.

 

 

에디터 사진

 

갑자기 끊기 연락?이유는 ‘알츠하이머

 

하지만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병원 및 시설에 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렇게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정말 포기를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즈음 갑자기 영어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다운타운에 사는 사촌을 만나러 갔다가 켄의 집에 들러 봤는데 우연히 그의 우편물을 빼고 있는 한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와 이야기 끝에 드디어 켄이 어느 요양 시설에서 지내고 있는지 알게 됐다고 하며 그의 연락처를 주며 나보다 더 기뻐해 줬다. 그 연락을 받고 난 바로 켄과 통화를 하고 다음날 가는 토론토행 비행기에 올랐다.

 

홀로 지내던 그는 갑작스럽게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요양 시설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토론토로 바로 간다고 이야기한 그는 나에게 자기 법정 대리인 연락처를 주며 그녀에게 집 키, 여행 경비 등을 받으라고 했는데 난 알아서 거절을 했지만 그 법정 대리인 A는 나에게 약간의 무례한 말까지 하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메일에도 “넌 그의 돈을 1달러도 가질 수 없다. 그가 무슨 말, 유언장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그는 지금 알츠하이머라 의미가 없고 내가 법정 대리인이다”.

 

훗날 그 이메일을 가지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A에게 사과 및 그의 유언장 관련 법정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아무튼 켄은 알츠하이머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고 난 2018년에도 그의 생일 즈음에 그를 찾아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다. 2019년에는 결혼할 상대를 소개해 드리러 그가 있는 의료 시설에 세 번째로 방문하기도 하였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켄은 신기하게도 나와의 기억은 선명하게 하는 부분에 해당 의료시설에서도 신기하다고 할 정도였다.

 

켄은 마지막 여행으로 나와 본인의 고향에 한번 가고 싶다고 하고 나의 결혼식에 오고 싶다고 하였지만 알츠하이머가 더욱 심해져서 의료시설에서 해외여행이 불가하다는 최종 판정을 받았다. 난 신혼여행도 켄을 만나려고 가려고 했으나 결혼을 했을 당시 2020년, 코로나로 인해 그를 찾아가지 못했다.그리고 21년 여름 즈음, 켄에게 안부 전화를 했더니 켄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요양 시설에서도 나에게 이제 전화를 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였다.

 

 

‘전재산 상속’ 받았지만 거절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22년 12월 겨울에 영어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토론토 부고 신문에 켄의 소식이 올라왔다며 혹시 법정대리인과 사이가 안 좋아서 알지 못할 수도 있어서 연락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 연락을 받았을 당시는 아이가 태어난 지 일주일 되는 날이어서 난 켄을 뵈러 갈 수가 없었다.

 

다시 변호사를 고용해서 켄의 변호사에게 왜 나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으며 유언장 관련 확인하려고 했으나 많은 비용과 시간에 대한 부담으로 진행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고 2023년 4월 즈음에 홍콩 사설탐정에게 LEEYOONWOO가 맞냐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고 그렇게 시작된 연락이 두 달 뒤에 켄의 새로운 변호사와 닿게 됐고 그 변호사는 나에게 우편으로 켄의 유언장을 보내주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남긴다는 유언장이었고 그 변호사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며 토론토에 올 수 있냐는 제안을 했다.

 

난 1년 기일이 되기 전에 가려고 했으니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했고 그렇게 23년 12월 아이의 첫돌잔치를 마친 다음날 늦었지만 켄에게 인사를 전하러 토론토에 갔다. 4년 만에 도착한 토론토 공항에서 도착장에 항상 같은 자리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서있던 켄은 없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그와 함께 했던 토론토는 그대로였다.

 

변호사를 만나 그가 남긴 유품들 중 그가 오래 일을 했던 CBC 방송국에서 요구한 물품들은 기부하였고 그 외의 유언을 집행한 뒤 그와의 추억이 있는 곳을 돌아보며 그를 추억하고 추모했다.

 

<이미지 출처=이윤우 개인 소장>

 

 

 

에디터 사진

 

켄 드루스는?

 

풀코스 마라톤 완주?80세까지 현직 유지

 

캐나다 저지주 세인트 헬리어에서 태어난 켄 드루스(1934~2022년)는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가족이 없었다. 18살의 나이에 토론토에 정착한 그는 80세가 넘을 때까지도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CBC 방송국의 의상 디자이너로 높이 평가되고 존경을 받았다.

 

아직도 그의 토론토 아마추어 풀코스 마라톤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으며 보스턴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서 서브 쓰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켄이 남겨준 유품은 아끼던 그림 1점, 시계 2개와 그가 평생 착용하고 아끼던 20여 개의 반지와 팔찌 등이 있다. 그 외 유산의 금액을 정확히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오래 일했던 CBC 방송국과 그가 6년 동안 지냈던 시설과 그를 가장 오래 돌봐준 간병인들에게 기부를 했다.

 


    금주의 이슈

    이번호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