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 해전 승전지 북항에 부산대첩 공원과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부산대첩기념사업회가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부산시는 물론 시민 모두가 하나되어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 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한다. 이순신은 우리에게 피끓는 이름이다. 나라에 헌신하고 백성을 아껴 성웅으로 추앙되는 충무공의 리더십을 부산시민정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부산대첩기념관은 역사문화유산인 관광자원으로 부산의 또다른 관광콘텐츠가 될 수 있다. 부산왜관의 역사와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함께 어우르는 미디어 영상관이 만들어 지면 빛과 소리로 새롭게 탄생시킨 빛의 벙커처럼 부산관광의 브랜드가 될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부산대첩 일화를 통해 새로운 부산관광의 콘텐츠가 널리 알려지길 희망한다.
< 글쓴이: 장순복 부산광역시 관광협회 부회장(대륙항공여행사 대표) >
조선에서의 전쟁 참상이 상세히 묘사된 일본책. 아기가 엉금엉금 기어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1596년 여름 이순신은 일본으로 건너갈 사신단의 배 3척과 노젓는 군사, 양식 등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했다. 일본에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은 열흘이나 계속되며 깔려 죽은 사람들이 수만여 명에 이르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00년 만의 대홍수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원망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자연재해라는 위기상황과 성과없는 전쟁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하여 제2차 조선침략을 명령했다.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장계로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를 막으라는 출전명령이 떨어졌다.
경상도 위무사 황신이 선조의 해로차단 명령을 전달했을 때 이순신은 곧바로 장계를 올리며 이 지시를 거부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는 가장 용맹스럽고 전투에도 능했으며 惡鬼(악귀)로 불리울 정도로 잔인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전공 때문에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견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요시라(要時羅)의 간계와 원균의 장계로 이순신은 무장으로써 조정을 경멸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이 되었다.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을 포위하고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고립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울산성 전투도병풍 ⓒ북촌미술관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 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순신을 잡아올 때 선전관에게 標信(표신)과 密符(밀부)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보내라.”
선조 임금이 1597년 2월 6일 김홍미에게 전교한 내용이다. 1597년 2월 10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체포명령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부산포를 공략하고 있었다. 12일까지 밤이면 절영도 해안에 정박하고 해가 뜨면 왜영을 쳐부수는 전투를 사흘간 벌였다. 이순신 함대가 일본수군을 완전히 압도한 대승첩이었다. 제2차 부산대첩은 정유재란 발발 이후 양국 군대가 싸운 최초의 전투였다.
2월 28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의 장계는 당시의 전투상황을 알 수 있다. 부산포 앞바다에서 나아가고 물러서며 兵威(병위)를 과시하고 가덕도 等處(등처)에서 접전한 절차는 전 통제사 이순신이 이미 급하게 장계를 보냈습니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 탐문하였더니 “전 통제사가 부산포 앞바다로 가서 나아가고 물러서며 병위를 과시할 때 통제사가 탄 배가 적진 가까이 갔는데 조수가 물러가 물이 얕아지면서 배 밑창이 땅에 닿아 적에게 배를 빼앗기게 되었을 적에 배 위의 戰卒(전졸)들이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안골포만호 우수가 노를 빨리 저어 이순신을 등에 업어 어렵게 우수의 배로 옮겼고 이순신이 탔던 배는 선미에 연결하여 간신히 안골포로 끌어왔습니다.” “이번 부산의 거사에서 우리나라 군졸들이 바다 가득히 죽어 왜적의 비웃음만 샀을 뿐 별로 이익이 없었으며 매우 통분한 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여러 장수들을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균의 장계와 함께 도원수 권율이 보낸 장계도 수록되어 있다.
2월 20일 장계는 2월 10일 200여척 조선 함대가 다대포에 머물렀다. 2월 23일 장계는 이순신 함대와 함께 출전했던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보고서를 토대로 쓰여졌다. 2월 10일 일기가 온화했다. 저와 통제사 경상우수사가 일시에 전선 63척을 거느리고 장문포에서 배를 띄워 부산 앞바다에서 전투를 치루었다.
부산포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부산으로 유인해 동시에 참살하고 오지 않는다면 엄습하여 죽인다는 밀약을 맺었다는 보고서를 그대로 싣고 황당한 일이지만 보고 드린다는 내용이다. 제2차 부산 대첩은 도체찰사 우의정 이원익도 동의했고 조정에 잘 알려진 상태로 실행됐다.
전선의 수가 2월 20일에는 200여 척 2월 23일에는 6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63척은 실제로 싸우는 대형 전함인 판옥선 수이며 200여 척은 중선과 소선을 망라한 숫자로 보인다.
오늘날까지도 제2차 부산대첩은 아예 존재하지 않은 전투로 남아있다.
왜군이 머물던 순천 왜성을 공격하는 임진정왜기공도. 이 전투를 끝으로 1598년 11월 19일 임진왜란이 끝났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월부터 노량해전으로 전사하기 전인 1598년 11월까지 쓰여졌다. 공교롭게도 1596년 10월 12일부터 1597년 3월 31일까지 5개월간의 일기는 남아있지 않다.
충무공 수련원 최두환 연구실장은 충무공 이순신의 해양 전략 사상연구라는 논문에 1597년 3월 17일 이순신이 보고한 내용을 실었다. “여러 전선에서 용감한 군사들을 뽑아 육지로 가서 모조리 섬멸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릇 성 안팎의 6·7개소에서 진치고 있는 왜적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말을 타고 용맹을 보이는 놈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말도 없이 힘이 약한 외로운 군사를 경솔하게 육지로 보낸다면 이것은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좋은 계책이 아니며 또 날도 저물어가니 왜적의 소굴에 있다가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될 재앙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로 되돌아와서 밤을 지냈습니다.”
이순신은 2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된 후 3월 말까지는 감옥에 있었다.
1597년 3월 17일 보고서는 언제 쓴 것일까? 1597년 7월 16일 새벽 칠천량에서 대패한 원균의 수군은 궤멸상태였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9월 16일 13척의 함대를 이끌고 거의 20배가 넘는 왜군을 물리쳤다. 명량해전이다. 두 달 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은자 20냥을,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정보를 흘린 요시라에게는 정3품 당상관 벼슬에다 은자 80냥을 상으로 내렸다. 반간계로 이용한 요시라의 가치가 장엄한 승리를 이끌어낸 이순신보다 높았다. 그래도 이건 아닌데라는 씁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1598년 11월 18일 새벽 이순신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오늘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하늘은 반드시 왜적을 섬멸시켜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난중잡록에 전한다. “한 번 바라소리가 울리니 포와 북소리가 진동했다. 조선군과 명군이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동이 트기 전 큰 피해를 입은 왜군 함대는 남해섬을 돌아나가는 줄 알고 들어간 관음포에 갇혀 버렸다.
독 안에 가둬두고 적을 섬멸하던 중 이순신이 군관 송희립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일어서다가 총탄을 맞았다.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라며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며 높이 샀다. 이순신은 함대 앞에서 전투를 이끌어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
1592년 10월 5일 이순신 함대가 총통과 불화살을 쏘며 부산포일본함선을 공략하고 있는 모습 아산 현충사 벽에 걸려있는 유화 그림
이순신 장군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안위야 네가 정녕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간들 살 것 같으냐?